paper note

디지털 노트 미치광이가 종이 노트로 돌아가다.

요새는 블로그에 직접 포스팅하거나 개인용 노션에 적기 보다는 , 크고 작은 종이 노트 여러 권에 그때 그때 가볍게 적어내리고 있다.

2015 년 부터, 다시 말해서 개발을 접하기 훨씬 전부터, 나는 디지털 기록에 대한 환상과 선망을 가지고 있었다.

2020 년이 된 현재, 다시 종이 노트로 회귀를 선언하니, 그러한 결론을 내린 과정과 이유를 좀 적어보고자 한다.

왜 디지털 노트를 신봉하게 되었나?

청소년 시기에도 나는 기록광이었다. 일기 쓰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특히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나 내가 따로 정리한 무언가를 적어놓고 소유하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고 3 때 아끼던 영어 어휘 노트와 국어 어휘 노트 , 수학 오답노트를 수능이 끝나며 모두 버렸고 , 나중에 그것이 다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큰 아쉬움을 느꼈다.

마치 어느 싸구려 공상 과학 영화에 나오는 박사가 , 자신의 아들이 죽고나서 기술과 문명의 힘을 빌려 로봇이나 피조물의 형태로 부활 시키고 싶어하듯이

에초에 내가 남긴 기록물들이 , 사라지기 힘든 형태나 옮기기 쉬운 형태로 저장되어 있었다면, 그리 허망하게 잃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을 갖게 된다.

그래서 휴대폰 노트나 , 애플펜슬과 아이패드를 이용해서 필기를 해보거나 하는 등의 이런 저런 시도를 거쳐 보았다.

처음에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 친구들이 프린터를 몇십장씩 해서 강의실로 들어올 때, 아이패드 하나를 들고

불을 처음 발견한 원시인 처럼 의기양양하게 복도를 가로지르는 것은 참으로 유쾌하고 즐거웠다.

하지만, 이는 달콤한 환상이었고, 사막위에 지은 궁궐이었다.

디지털 노트의 치명적인 단점은 출력이 아니라 입력일 수도 있다.

사람이 글을 쓸 때에는 , 사실 시각과 청각으로만 피드백이 날아오는 것은 아니다,

특정 어휘를 쓸 때 힘이 들어가면 촉각적인 압력도 다르고 , 연필이나 볼펜을 바꾸면

후각을 자극하기도 한다. 또한 만년필의 서걱거리는 촉각과 청각은 뇌를 활성화 시키기에

아주 충분하고 풍부한 자극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한 피드백들은 글을 쓰고 난 이후에 다시 보았을 때

기억의 인출이나 당시의 감정 같은 세세한 부분까지도 되돌려 줄 수 있다.

이는 종이책을 볼 때에도 , 비슷하게 발견되는 현상이다.

또한, 종이 필기는 큰 피로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종이 보고서와 디지털 보고서 링크를 받아 열어보면 그 차이를 확연이 알 수 있는데,

인간의 지각은 생각보다 아주 다채롭고 예민한 것이어서 , 책을 읽고 책장에 박아놓는 것만으로도

그 책장을 스치면 대강 그 책의 내용을 기억하기 더 쉬워지기도 한다.

줄을 치거나, 메모를 하는 등의 습관도 비슷하다.

이러한 다양한 감각 채널의 자극과 실제 사물로 존재함을 지각하는 자연스럽고 익숙한 인지가 맞물리면

디지털 필기와 꽤 큰 효율의 차이를 불러 일으킨다.

어쨌거나, 디지털 필기를 완전히 버릴 이유는 또 없다.

지금은 이런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리에 앉을 수 없는 이동 중에는 , 노션을 사용한다.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이동 중에는 , 휴대용 수첩과 연필을 사용한다.

퇴근 후 집에서는 작은 일기장을 사용한다.

주말이나 시간이 길게 남는 경우에는 큰 노트를 사용한다.

그리고 위 4 개의 기록 중에, 쓸만한 것이 있으면 블로그에 게시한다.

중요한 것은 도구가 아니라 추상적인 의도와 목적이다.

나의 생각이 미천한 기억이라는 모래사장 위에서 바스러지지 않기 위해서

또한 과거의 나에게 의견을 듣기 위해서

이 모든 삽질을 하는 것이니

효율과 성능, 사용성만 좋고 실용성이 있다면

주저 말고 개선하고 다른 도구와 방법들도 채택해 나갈 것이다.